책소개
“위대한 러시아 문학은 <하지 무라트>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마르크 알다노프
톨스토이가 1896년 8월부터 쓰기 시작해서 8년이 지난 1904년이 되어서야 완성한 <하지 무라트>는 다시 한 번, 톨스토이가 실로 뛰어난 작가이자 천명을 부여받은 예술가임을 세상에 증명한다.
이 작품의 초안 제목은 <엉겅퀴>였는데, 그 이유는 한 인간이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형상을, 줄기의 가시로 끈질기게 자신을 지키려는 엉겅퀴의 형상에 겹쳐서 보여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판본의 제목은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뜻의 <하자바트>였는데, 자신의 토지를 지키며 삶의 권리를 보전하려는 ‘거룩한 사명을 띤 민중들의 전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19세기의 제국 러시아’를 향한 캅카스 지역의 소수민족들의 전쟁이자, ‘차르식 통치 방식’에 대항한 전쟁이었다.
주인공 하지 무라트는 샤밀의 압박과 견제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러시아로 넘어갔지만, 샤밀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가족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지낸다. 그는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그 모든 게 무위로 그치자, 결국에는 부하들과 함께 산으로 탈주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가족을 구출하러 가기도 전에 러시아군과 민병대의 추격을 받고 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하지 무라트는, 좁은 의미에서는 가족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 종족(민중)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전사다.
하지 무라트의 형상화
하지 무라트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아바르 한국(汗國)의 지배자 샤밀 쪽의 제일 용맹한 우두머리 장수였다. 1851년 12월 11일 발행된 티플리스의 ≪캅카스 신문≫은 하지 무라트가 러시아로 넘어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하지 무라트와 그 주변 인물들을 적확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역사적 문헌과 기록들을 연구하고, 하지 무라트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캅카스 지역의 일상적 삶의 세목(細目)’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하지 무라트의 형상을 정확히 구현하고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진술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하지 무라트 형상의 정확한 구현과 더불어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진술하는 데 중점을 두는 한편, 하지 무라트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두 진영(니콜라이 1세와 샤밀)의 관계에도 초점을 맞춘다. 또한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의 세계사의 흐름과 <하지 무라트>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연관시켜서 고찰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 무라트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던 두 진영의 관계가, 민중(하지 무라트)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제국주의 진영(니콜라이 1세)과 식민지 진영(샤밀)의 관계로 재해석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더 확장시켜 보면 ‘유럽적 요소’와 ‘아시아적 요소’의 ‘갈등과 충돌’이 그려진다.
톨스토이는 하지 무라트를 입체적인 인물로 파악했다. 전장에서는 적군에게 잔인하고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전사(戰士)로, 일상적 삶에서는 부하에게 도량이 넓으면서도 위엄과 절도가 있는 수장으로 묘사한다. 또한 노회한 노(老)공작 보론초프 앞에서는 당당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통해서는 일관되게 자기 가족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인간미 넘치는 가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 무라트의 형상은 그야말로 ‘인간의 유동성’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형상에서는 ‘인간의 유동성’보다는 오히려 ‘인물의 전형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톨스토이가 하지 무라트의 형상을 더 오롯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녀의 형상을 전형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박하고 다정한 러시아인들(젊은 장교 부트렐과 로리스 멜리코프,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 그녀의 어린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지 무라트에게 매료되고, 하지 무라트 역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마음을 여는데, 이 또한 하지 무라트의 개방성과 인간미를 표현하기 위한 작가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 무라트>는 시작 부분에서의 러시아 병사 아브데예프의 죽음과 결말 부분에서의 하지 무라트의 죽음이 상응하면서 대칭 구조를 이룬다. 또한 상승하는 슈제트와 하강하는 슈제트의 노선에서 전쟁과 결부된 일련의 사건들이 ‘축적되는 구조’를 통해, 아브데예프와 하지 무라트의 죽음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하지 무라트>에서 단편적 사건들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속에 녹아들게 하면서 자신이 의도하는 ‘주도적 관념의 운동’ 속으로 침투시킨다. 또한 ‘현미경적 묘사’와 ‘망원경적 묘사’를 교차-결합시키는 기법을 활용하기도 하고, 지각(知覺)을 강화시키는 ‘낯설게 하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책은 예술문학(Художественная литература)출판사에서 발간한 22권의 톨스토이 전집 중에서 1983년에 출간된 제14권을 저본으로 사용했다.
또한 부록에 옮긴이가 쓴 논문을 실었다.
200자평
톨스토이의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예술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소설.
불의에 맞서 죽을 때까지 싸우면서 끈질기게 자신을 지키려는 엉겅퀴 같은 하지 무라트의 이야기. 생애를 걸고 투쟁한 하지 무라트의 배반에 대한 정당성은 ‘신앙’과 ‘신념’의 모티브 중 어디에 더 의미를 둔 걸까.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면서 하지 무라트의 강한 에너지와 생명력을 느껴 본다.
지은이
레프 톨스토이(Лев. Н. Толстой)는 1828년 8월 28일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툴라현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인으로 크림전쟁에 참전했고, 그곳에서 최초의 이야기 ≪유년 시절≫(1852)을 완성해 네크라소프 추천으로 ≪동시대인≫에 발표했다. 톨스토이가 청년기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는 농민과 교육과 전쟁이었다. 이 시기에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 ≪지주의 아침≫(1856) 등을 완성했다. 1857년부터 1859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하기도 했다. 1860년 형 니콜라이가 사망하자 심한 타격을 받았고, 1862년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1873∼1878) 등 대작을 집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1870년대 후반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몇 장을 쓸 무렵,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을 계속했다. 결국 삶의 의의는 과학이나 철학도 설명할 수 없고, 이성의 힘에 의지해서도 해결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태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톨스토이는 1910년 10월 28일 새벽, 생애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가 폐렴으로 시골 작은 기차역 아스타포보 역장 관사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에 묻혔다.
옮긴이
강명수는 1965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했다. 1985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 입학한 뒤 대학 생활의 절반을 ≪고대신문≫에서 기획 면과 학술 면을 담당하며 보냈다. 동 대학원에서 체호프 후기 단편소설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아주어과(러시아어 담당)에서 강사,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군 복무를 대체했다. 그 후 러시아로 유학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상적인 중편소설 연구: ‘등불’에서 ‘6호실’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에서 <가르신의 ‘붉은 꽃’과 체호프의 ‘6호실’에 드러난 공간과 주인공의 세계>라는 연구로 박사 후 과정을 마쳤다. 2005년까지 고려대학교(학부)와 중앙대학교(학부와 대학원)에서 러시아 어문학과 문화, 체호프와 톨스토이를 강의했다. 2006년부터 청주대학교 인문대학 어문학부 러시아어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체호프, 톨스토이, 가르신에 대한 주제로 28편의 논문을 권위 있는 전국 규모의 학술지에 게재했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체호프의 세계≫[개정판 ≪체호프와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4)]라는 학술서를 번역했다. 체호프 선집(총 5권)을 기획하고, ≪체호프 선집 4-철없는 아내≫(범우사, 2005)를 번역했다.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갈매기≫(지식을만드는지식, 2011)을 번역했고, 톨스토이 말년의 걸작 ≪하지 무라트≫(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위조 쿠폰≫(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홀스토메르·무엇 때문에?≫(지식을만드는지식, 2009)도 번역했다. 아울러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을 맞아 펴내는 톨스토이 전집(총 12권) 중에서 후기 걸작들이 담긴 제9권 ≪중단편선 IV≫(작가정신, 2011)를 번역했다. 또한 러시아어 교재 ≪쉽게 익히는 러시아어 2≫(공저, 신아사, 2007)도 출간했다.
차례
하지 무라트
부록 | <하지 무라트>를 깊이 읽는 몇 가지 방법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개간된 들판 가운데 짓뭉개진 엉겅퀴를 보았을 때, 나는 하지 무라트의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2.
머리의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파리한 입가에는 어린아이 같은 선량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3.
“만약 당신이 길을 가는 중에 기습을 받게 된다면?” 부트렐이 물었다.
하지 무라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의 손에 죽더라도 그것은 알라의 뜻일 겁니다. 자, 잘 있으시오.”